Wy/ko/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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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서,대한민국의 사적 제 124호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찾아가는 방법[edit | edit source]

  • 수도권 지하철 1호선,2호선 시청역

볼것[edit | edit source]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로서 이채롭다.

대한문[edit | edit source]

외부에서 바라본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의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 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시켜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금천교[edit | edit source]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중화문[edit | edit source]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중화전[edit | edit source]

덕수궁 중화전. 양편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있다.

석조전[edit | edit source]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1]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2]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이 건물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준명당[edit | edit source]

준명당에서 바라본 석어당

준명당(浚眀堂)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즉조당[edit | edit source]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석어당[edit | edit source]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2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덕홍전[edit | edit source]

덕홍전

덕홍전(德弘殿)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함녕전[edit | edit source]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정관헌[edit | edit source]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광명문[edit | edit source]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흥천사 범종,자격루의 일부,화차가 전시되어 있다.

인화문[edit | edit source]

인화문(仁化門)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후 1905년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양이재[edit | edit source]

정관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 하고 있다.

중명전[edit | edit source]

평성문 밖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중명전(重明殿)이 있는데,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건물이 개인 소유가 되면서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었는데, 2010년 복원 공사를 마쳤다.

없어진 건물[edit | edit source]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edit | edit source]

매일 (월요일 제외) 오전 11시,오후 2시,오후 3시 에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단, 혹한기,혹서기(영하 5도 미만),눈이 오거나 비가 올 시 휴무한다.

갤러리[edit | edit source]

주석[edit | edit source]

  1. 계간 시대정신 - 【건축】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
  2. 1937년에 조성되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