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Malis0617am/번역/2
Template:좌표 유귀(流鬼, Template:Llang, Template:Llang, Template:Llang, 예노말(키릴): Крафто/Карафуто/Карафто)는 노서아의 섬이다. 남북의 질럭시 950km, 췌대 폭 160km, 너베기 72,492km2 나문이다.[1] 또시 노서아서 ᄀᆞ장 큰 섬이기도 하다. 타타르 해협광 오호츠크 해 ᄉᆞ시에 이시멍, 쿠릴 열도왕 ᄒᆞᆫ듸 노서아의 유귀쥬를 일룬다. 유귀쥬의 서월은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한국의 역ᄉᆞ로는 일제강점기 ᄀᆞ리 한국인이 강제징용 된 곳으로 한인역사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2]
명칭
[edit | edit source]- 러시아어: Sakhalin, Saghalien
- 만주어: Template:만몽 유니코드
- 중국어: 庫頁島(고혈도), Ku-Ye-Dao
- 일본어: 가라후토(からふと, 樺太, 화태)
- 아이누어: 카무이 카라 푸토 야 모시르(Kamuy Kara Puto Ya Mosir)
- 영어: Sakhalin, Sajalin, Karafuto
- 독일어: Sachalin, Karafuto
- 프랑스어: Tarrakai(고대 프랑스어), Sakhaline, Karafouto
- 에스파냐어: Sakalin, Sajalin, Karafuto
- 한국어: 사할린, 부상(扶桑)
만주어로 "사할린 강 하구에 있는 험준한 돌덩어리"라는 뜻의 "사하랸 울아 앙아 하다"(Template:만몽 유니코드)라 하였으며, 여기서 사하랸 울아(Sahaliyan Ula)란 "검은 강"이라는 뜻으로 곧 흑룡강을 가리킨다. 러시아어를 비롯하여 서양에서 부르는 "사할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은 사할린을 이 명칭으로 부르기보다 주로 '쿠예(Kuye)'라고 불렀다.
가라후토
[edit | edit source]'가라후토'라는 이름은, 일설에는 아이누 민족이 이 섬을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리 」(kamuy kar put ya mosir)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것은 아이누어로 「신이 강의 하구(河口)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로, 헤이룽 강(흑룡강)의 하구(河口)에서 보아 그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한다.
에도 시대에는 홋카이도를 가리켜 에조치(蝦夷地)라고 부른 것에 대응해서, 북 에조(北蝦夷)라 부르기도 했다. 후에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北海道開拓使)를 설치한 이후, 북에조라는 명칭은 가라후토(樺太)라고 바뀌었고, 일본어권에서 가라후토라는 명칭이 비로소 정착되었다.
'사할린'또는 '사가렌'이라는 명칭은, 청의 황제가 3인의 예수회 수도사에게 명해 청 제국의 판도를 측량하던 중에 흑룡강(Sahaliyan Ula) 하구 맞은편에 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주어로 사하랸 울아 앙아 하다(Sahaliyan Ula Angga Hada: 흑룡강 맞은편의 섬)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다만, 청은 가라후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청 직할령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또한, 일본이 남부 사할린을 영유하였던 시대에는, '가라후토'라 함은 남가라후토를 지칭하는 것이었던 탓에, 서로 구별할 필요로 인해 북사할린을 사가렌[薩哈嗹]이라 부른 경우도 있었다.
미나미카라후토
[edit | edit source]미나미카라후토(南樺太) 또는 남가라후토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불렸던 일본 제국의 행정구역이었다. 지방 행정관청으로서 가라후토 청(樺太庁)이 설치되어,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에, 외지(外地)에서 내지(内地)로 편입되었다. 1945년 당시 인구는 약 40만 명, 주요산업은 어업, 농업, 임업과 제지, 펄프 등의 공업, 석탄・석유의 채굴업 등이었다. 남가라후토의 중심 도시는 가라후토 청이 설치되어 있었던 도요하라 시(豊原市)였다.
기타카라후토
[edit | edit source]기타카라후토(北樺太)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이래 러시아령으로서, 러시아 제국 연해주, 소련 하바롭스크 지방, 그 후에는 사할린주에 속하여, 러시아 연방이 들어선 현재에도 계속 사할린 주에 속해 있다. 주요한 도시로는 오하, 알렉산드롭스크사할린스키(일본명 오치쓰, 落石) 등이 있다.
역사
[edit | edit source]- 1799년: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 섬 남쪽 끝에 영향력 행사.
- 1821년: 일본 마쓰마에 번이 일부를 영유.
-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 선언.
- 1867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가 됨.
- 1875년: 러일 양국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조인. 사할린 섬 전체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됨.
-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 제국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를 넘겨받아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 설치.
- 1907년: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
- 1918년-1925년: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틈타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까지 점령.
- 1942년: 내무성(중앙정부 행정 기관)이 가라후토 청을 편입. 사할린 섬 남부가 가이지(식민지)에서 나이지(일본 본토)로 편입.
-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 섬 남부까지 차지.
- 1946년: 소련이 사할린 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선언.
-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 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포기. 이로써 섬 전체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기온과 기후
[edit | edit source]산업
[edit | edit source]주요산업은 광업이며, 그 밖에 석유, 석탄, 천연가스, 펄프, 제지업, 어업과 어류가공, 임업·제당업, 목축 등이다. 주요 항구로는 코르사코프, 홀름스크,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키, 사할린스크, 우글레골스크 등이 있다.
주민
[edit | edit source]사할린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인(78%)이고, 우크라이나인이 7.4%이다. 그 밖에 최대 소수 민족은 사할린 한인(6.5%)이다. 사할린 섬에 사는 한인의 수는 약 4만 3000명이며, 이들 중 대한민국으로의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7,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원주민(0.4%)은 남부의 아이누, 북부의 길랴크(니브히족) · 윌타족이 있으며,[1] 그 밖에 소수의 일본인, 벨라루스인, 몰도바인, 타타르족, 모르도바인, 오로치족도 거주한다.